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그리스와 덴마크의 소피아(1914) (문단 편집) === 두 번째 결혼 === || {{{#!wiki style="margin: -5px -10px" [[파일:소피하노버.jpg|width=100%]]}}} || || 1946년 볼프스가르텐에서[br] 하노버의 게오르크 빌헬름 왕자와 소피아 || 1943년 10월 소피아는 브라운슈바이크 공작 에른스트 아우구스투스의 아들이자, 그리스의 프리데리케 왕세자비(당시 기준)의 동생인 게오르크 빌헬름 왕자[* [[빌헬름 2세]]의 외손자(고명딸 [[빅토리아 루이제 폰 프로이센]]의 차남)로 전 남편 크리스토프의 5촌 조카이기도 하다. 친할머니인 [[덴마크의 티라]]가 소피아의 할아버지 [[요르요스 1세]]의 여동생이니 소피아와는 6촌간이다. ([[빅토리아 여왕]]의 기준으로도 친척으로, 둘 다 빅토리아 여왕의 고손이므로 8촌이 된다. 또한 [[작센알텐부르크 공국]]의 공작 요제프 기준으로도 8촌으로, 게오르크의 할아버지 에른스트 아우구스트가 소피아의 할머니 [[올가 콘스탄티노브나 로마노바|올가 왕비]]의 이종사촌이다.) 영국과 아일랜드의 왕자 칭호도 있었으나 적국(독일) 편에서 싸운 영국 귀족들의 작위 박탈을 규정한 1917년 영국의 작위박탈법(1919년 3월 28일 발효)으로 박탈되었다.]와 가까워졌다. 헤센의 마르가르테의 격려를 받은 두 사람은 계속 로맨스를 이어나가다가 마침내 1946년 1월 결혼하게 되었다. [[하노버 왕조]]는 촌수가 멀긴 하지만 영국 왕실과 친척 관계였기 때문에[* 하노버 왕조는 [[조지 3세]]의 5남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1세의 후손들이고, 당시 영국의 [[윈저 왕조]]는 조지 3세의 4남 [[에드워드 어거스터스|켄트 공작 에드워드]]의 외동딸 [[빅토리아 여왕]]의 후손들이었다.], 에른스트 아우구스투스는 약혼을 진행하기 위해 [[조지 6세]]의 허가를 구했다. 그러나 영국과 독일이 여전히 전쟁 중이기 때문에, [[https://www.heraldica.org/topics/britain/TNA/LCO_2_3371A.htm|영국 정부는 조지 6세의 대응을 금지했다.]][* 1772년 제정된 영국의 왕실 결혼법(Royal Marriages Act 1772, 2015년 폐지) ( [[https://en.wikipedia.org/wiki/Royal_Marriages_Act_1772/|#]])에 따라 조지 6세에게 허가를 신청했지만, 공식적인 요청에도 불구하고 결혼 허가가 보류된 유일한 결혼이 되었다.] 대신 조지 6세는 개인적으로 결혼을 승인해주었고 소피아와 게오르크 빌헬름을 축복했다. 조지 5세의 왕비 [[테크의 메리]]도 이 결혼에 대해서 기쁘다고 밝혔다. 메리 왕비는 소피아의 어머니 [[바텐베르크의 앨리스 공녀]]에게 “어린 과부 타이니는 5명의 아이들이 있으니 큰 집이 필요하겠어! 소피아랑 게오르크는 행복해보여.”라고 편지했다. 결혼식이 4월로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소피아는 프리드리히스호프 성에 남긴 보석을 사용할 수 있도록 미국 당국을 설득했다. 필요한 허가를 받은 소피아와 시어머니 마르가레테는[* 첫 번째 남편 크리스토프의 어머니] 성으로 갔고, 그곳에서 볼프강 공자가 1943년에 지하실에 숨긴 보석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. 그러나 실망스럽게도 보석들이 도난 당했다는 것을 깨달았고, 곧 지하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내기 위한 조사가 시작되었다. [[헤센 보석 도난 사건]] 참조. ||{{{#!wiki style="margin: -5px -10px" [[파일:소피웨딩.jpg|width=100%]]}}} || || 소피아와 게오르크의 결혼식.[br]왼쪽부터 [[필립 마운트배튼|필립]], [[그리스와 덴마크의 마르가리타|마르가리타]], 소피아 본인, [[그리스와 덴마크의 테오도라|테오도라]] || 덕분에 소피아와 게오르크의 결혼식은 형부 바덴의 베르톨트(둘째언니 테오도라의 남편, 또한 게오르크의 고종사촌이기도 하다)의 잘렘 성에서 예상보다 조촐하게[* 게오르크는 초혼이었지만 소피아는 재혼이었기 때문에 간단하게 치러졌다고 한다.] 치러졌다. 소피아는 1937년 이후로 보지 못했던 남동생 [[필립 마운트배튼|필립]]과 재회했는데, 이때 필립이 아버지 안드레아스 왕자와 너무 비슷해졌다며 놀라워했다. 소피아는 게오르크와의 사이에서 세 명의 자녀를 낳았다. 차례대로 장남 벨프 에른스트(1947-1981), 차남 게오르크(1949), 장녀 프리드리케(1954년생)였다. 참고로 장남 벨프는 사촌인 [[찰스 3세]]와 같이 고든스턴 스쿨에 다녔고, 인도에서 지내면서 [[오쇼 라즈니쉬]]에 심취해 있다가 1981년 초 [[뇌출혈]]로 요절했다. ||{{{#!wiki style="margin: -5px -10px" [[파일:2F662BEE-7BFD-4278-A9AF-0D8415FA6F50.jpg|width=100%]]}}} || || 새로운 가족과 함께 스코틀랜드의 [[밸모럴 성]] 1955.8.16[br]클라리사, 소피아, 프리드리케, 게오르크, 게오르크 빌헬름, 웰프 || 게오르크가 1948년 [[괴팅겐 대학교]]에서 법학 공부를 마쳤을 때, 그의 처남인 바덴의 베르톨트가 제2차 세계대전으로 잠시 운영을 멈췄던 자신의 잘렘 학교를 맡아달라고 부탁했다. 게오르크와 소피아는 언니 [[그리스와 덴마크의 테오도라|테오도라]]가 제공한 잘렘의 큰 집에 정착했다. 소피아와 그녀의 가족은 게오르크가 학교 이사직을 포기한 1959년까지 잘렘에서 머물렀다. 소피아와 게오르크의 재정 상황은 오랫동안 불안정했다. 그래도 소피아가 외할머니 [[헤센의 빅토리아 공녀]]로부터 유산을 상속받은 1950년부터는 상황이 점차 나아졌고, 1951년에는 [[헤센 보석 도난 사건]]도 결론이 나면서 독일 정부에서 피해 보상금을 받을 수 있었다.[* 보석을 절반 정도는 회복했으나 도난 과정에서 보석들이 많이 손상돼, 원래 가치의 30%도 회복하지 못했다 한다.]1953년 나치 정권에서 소피아의 첫 남편 크리스토프가 맡은 역할에 대한 조사의 끝으로 소피아의 재정 상황이 정상화됐다. 1946년 친정인 [[그리스 왕국]]에서 군주제가 복고되었고, 소피아의 사촌오빠 [[파블로스]]가 [[1947년]] [[4월 1일]] 즉위하였다. 이후 소피아는 1948년에 어머니 [[바텐베르크의 앨리스 공녀|앨리스 왕자비]]로부터 아테네에 초대되었다. 그후 소피아와 남편 게오르크는 그리스의 [[파블로스]] 일가와 가까워졌다. 시누이(남편 게오르크의 여동생)이자 사촌올케(사촌오빠 파블로스의 부인)인 [[하노버의 프리데리케]]는 소피아를 가장 친한 친구로 여기게 되었다. 이러한 중첩된 인척 관계 덕분에 소피아 부부는 정기적으로 그리스 궁정에서 환영받았다. 1962년 [[소피아 왕대비|그리스와 덴마크의 소피아 공주]]와 [[후안 카를로스 1세|후안 카를로스]]의 결혼식에 초대되었고, 1964년 그리스의 [[콘스탄티노스 2세]] 왕과 [[덴마크]]의 [[아네마리 공주]] [* [[프레데리크 9세]]와 [[잉리드 왕비]]의 막내(3녀)로 [[마르그레테 2세]]의 여동생이다.]의 결혼식에도 참석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